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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신이시여 이게 정말 제가 한 귀성이란 말입니까

저녁 7시 1분. 중앙고속 우등 5178번 버스.
“교통 사정이 나쁘지 않다면 최대한 정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날 따라 더욱 선명히 들리던 그 안내 멘트가 처절한 재난을 알리는 복선이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평소 서울 대전 구간은 고속 버스로 평균 2시간이 소요되며 아저씨가 실력 발휘만 해준다면 한시간 반정도에 주파할 수도 있는 멀지 않은 거리이다.
그 날도 그랬다. 아무리 민족 대명절 설날이라지만 난 동요하지 않았다. 7시 차. 정상적으로 9시 도착 예정. 밀려봐야 11시라고 생각했고 이런 저런 생각할 것이 많았던 난 블랙 커피 한잔을 구입했다. 잠들지 않기 위해.

강남 고속 버스 터미널을 빠져나온 고속버스. 우연히도 내가 가장 선호하는 가장 뒷줄 왼쪽 창가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예매가 늦어서였겠지만)

어라,

출발부터 심상치 않다. 큰 도로에 접어들면서 부터 차들이 거북이 운행을 한다. 흠. 오늘은 11시나 되어야 도착하겠구나. 저녁에 신철이랑 잠깐 보기로 했는데, 오늘은 맥주 한잔정도밖에 못하겠네.

2시간 소요. 평소라면 도착했을 시간이다.

어디쯤일까. 눈이 내린다. 익숙한 건물. 현대 기아……. 여긴 설마 양재?
그렇다. 출발 두시간만에 난 서울 요금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 ㅅㅂ

겁이 난다. 이러다 12시 넘어서 들어가는건 아닐까. 아니야. 평균적으로 서울을 빠져나오는 이 구간은 항상 막혔다. 고속 도로 들어서고 전용차선 타면 금방일거야. 눈발이 굵어졌다. 요금소를 빠져나왔지만 버스는 전용차선에 들어서는 것 조차 힘겨워 하는 거대한 주차장을 헤메기 시작했다.

10시. 차가 움직이질 않는다.

11시.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오예!

11시 3분. 멈췄다. 3분 달렸다. 정말 딱 3분. 아직도 서울에서 멀리 오지 못한 것 같은데 11시가 넘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가는 기분. 사람들도 동요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겁먹은 표정. 여자 승객들의 짜증난 표정. 윗자리에서 내려다 보는 승객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내 바로 앞자리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아저씨. 새로 구입한 듯한 골프채를 어루만지며 고향을 그리고 있다. “이거 빨리 자랑해야 하는데” 여기 저기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 아마도 “엄마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먼저 주무세요” 이런 내용이겠지. 옆자리의 아가씨 “아 몰라 ㅅㅂ 야 오늘 못보겠다”. 짜증. 그래 11시 까지만 해도 우리 버스는 짜증으로 가득했다. 운전 기사 아저씨는 모든 걸 포기한 듯 위성 TV를 켜 주셨다. 이거나 보고 열 식히세요.

12시. 배가 고파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이 되었다. 어떤 아가씨가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무언갈 말했다. 화장실이 급했나? 한밤중에 선글래스 낀 멋쟁이 아가씨인데 창피하시겠소. 아니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빈속에 먹을 수 없는 약이라 했다. 아저씨는 차 속의 승객들에게 비상 식량을 구했다. 후우. 위험한 상황인가보다. 나의 피같은 칼로리 바란스를 양보해야겠군. 기사도 발휘. 이거 드세요. 절대 아가씨의 얼굴때문에 배푼 선행은 아니었다. 아가씨는 약을 먹고 잠잠해졌다.

12시 반. 지금은 어디쯤 왔을까 창밖을 바라본 난 경악했다. 출발한지 다섯 시간 만에 우린 오산 옆을 지나고 있었다. 오산 들어나 보았는가. 경기도 오산. 그렇다 경기도. 우린 다섯 시간 동안 서울을 출발해 경기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전쟁이 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대규모 피난민이 발생한다면 이렇겠구나 차라리 차를 버리고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편이 빠르겠다. 아, 난 피난가는게 아니라 나가 싸워야겠지. 흠.

1시 50분. 신철이에게 전화가 왔다. 신철아 왠지 오늘 나 대전 못들어갈 것 같다. 나중에 보자. 씁쓸한 웃음과 함께한 통화 자포자기랄까. 에라 잠이나 자야지. 눈을 감았다. 아뿔싸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 난 블랙 커피를 마셨던 것이다. 블랙커피. 소지섭이 광고하는 그 커피. 잠이 오질 않아. 잘 수가 없어.

2시가 넘었다. 표지판이 보인다. 대전 112km. 이젠 감이 없다 112km가 남았다라. 눈을 감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한시간이 흘렀다. 다시 표지판이 보인다. 이제 한 80km쯤 남았을까. 표지판이 가까워졌다. 대전 110km. 눈을 의심했다. 시계를 잘못 본 것일까. 아니다. 표지판을 잘못 읽었나 아니다. 한시간 동안 2km를 왔다. 공대 출신인 난 순간적으로 대전까지 남은 시간을 도출할 수 있었다. 2km/h. 110km. 남은 시간 55시간. 이틀 하고 7시간. 아 난 기축년 새해를 중앙고속 5178번 버스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헛 웃음이 터져나왔다. 버스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아까 12시에 팽배했던 짜증섞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분위기는 뭘까 그래.

공포.

어쩌면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보이기 시작한다. 배도 무척이나 고프다. 난 왜 아까 내 식량을 포기했을까. 아냐. 착한 일 했으니까 복받을 거야. 아까 그 아가씨. 아팠던 아가씨는 운전기사 아저씨와 무언가 대화를 또 나누고 있다. 상황이 심각한가 보다. 아저씨는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 전화를 한다. 119. 앰뷸런스를 부른다. 저 아가씨 실려가는건가. 그때가 새벽 4시 정도였다. 출발한지 9시간 경과.

패밀리가 떴다와 잡다한 예능 프로그램이 몇 편. 영화를 세 편 보았다. 뉴스도 잠깐. 캐스터는 그랬다. 고속도로에 눈이내려 귀성길이 수월하지 않을 것 같다고. 이봐. 이건 수월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이미 한 편의 재난일세. 모든 걸 포기했던 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웠다. 다섯시 5분.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가는거야!
다섯시 6분. 멈췄다. 문자 그대로 다시 ‘멈췄다’. 주변은 이미 고속 도로인지 주차장인지 스키장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뒤엉킨 차들이 눈밭 위에서 춤을 춘다. 바퀴가 빠진 차들은 제자리에서 용을 쓰고 있다. 한 렉서스는 차선 변경을 시도하다 차선과 차선 사이에 쌓인 눈들로 인해 좌절하고 앞만 보고 기어가기 시작했다. 대 자연은 렉서스와 마티즈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자연앞에 평등하다. 제자리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고 조금 움직이는 타이밍이 왔는데 우리 옆의 한 승용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자가 잠들었다. 설마 죽은건 아니겠지.

새벽 7시. 출발한지 12시간이 경과했다.  해도 뜨기 시작했다. 저 태양은 내가 아까 집에서 나오며 봤던 그 태양이 아니던가. 내가 경부 고속도로위에 있는 동안 지구가 반 바퀴 자전을 한 것이다. 놀랍다. 속속 기름이 떨어진 차가 보인다. 그들로 인해 더욱 더 고속도로는 난장판이 되어갔다.

아까 부른 앰뷸런스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갓길로 버스를 세우고 대기하기 시작했다. 7시 40분. 앰뷸런스가 오지 않는다. 저 아가씨 큰일나는건 아닐까. 앗 아가씨가 일어섰다. 운전기사 아저씨에게 그냥 가자고 한다. 40분을 기다려도 앰뷸런스가 오지 않자 우리 옆을 거북이 속도로 지나쳐 가는 다른 차를 보고 참을 수가 없었나? 난 직감했다. 저년 꾀병이다. 저런 샹! 버스 안이 술렁였다. 많은 승객은 그 아가씨가 꾀병이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린 낚였다. 안그래도 밀리는데 40분의 시간을 갓길에서 버린 것이다. 9시에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고속 버스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2시간 늦게 출발한 버스인데. 이미 천문학적인 시간을 길에 버렸지만 이건 아니다.

7시 53분. 대전까지 남은 거리 93km.  이제 반쯤 온건가? 출발한지는 13시간이 지났다.

8시 26분. 대전까지 남은 거리 91km. 40분동안 2km를 왔다. ㅋㅋㅋ 이젠 자포자기의 웃음이 난다. 버스 안 승객들은 이제 묘한 우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극한 상황에서 생겨날 수 있는 전우애 같은 것이었을까. 아, 아까 그 꾀병년빼고.

망향 휴게소에 도착했다. 멋진 이름이다. 한자 뜻이 이건진 모르겠지만 망향. 그래. 우린 진심으로 고향을 그리고 있었다. 승객들이 좀비의 얼굴을 하고 내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 뭐? 스피드? 아니. 식량. 식량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이미 그로기 상태. 앞으로 몇시간을 더 가야할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물과 먹을 것이 필요했다. 흡사 하이원 주차장에 내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편의점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많은 이들의 표정에서 난 절망과 희망 그 모두를 보았다. 우린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먹을 것이 앞에 있다. 우린 살 수 있다.

허겁 지겁 물과 초코바등을 구입했다. 살아야해.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모르니까.

내 앞에 있던 오타쿠 같던 NDSL 청년은 MT가서 먹는 거대한 뻥이요 한 봉지를 사들고 흐뭇해 했다. 나도 물을 마시고 앉아 기도했다. ‘신이시여 자비를’

기도가 통한 걸까. 9시가 넘어서자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지난 14시간의 한을 풀듯 액셀레이터를 밟아댔다. 얇은 화장지에 한 방울 떨어진 물방울 마냥 승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새 하얗게 변한 들과 나무를 바라보며 우리의 중앙고속 5178 버스는 달렸다.

10시. 대전이 보인다. 대전. 온 몸엔 소름이 돋았다.

10시 23분. 정부 청사 앞에서 버스의 문이 열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저씨의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 눈물이 고인다. 사람들은 아저씨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등을 두드렸고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대전이다. 대전이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인줄 나는 왜 몰랐던가. 우리의 귀향을 환영하듯 아파트 옥상에 쌓여있던 눈들이 흩날린다. 천국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골프채를 소중히 안고 택시에 오르는 교수로 보이는 아저씨. 15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울지 않았던 이번 여정의 숨은 공로자 아이들. 꾀병으로 지옥속을 탈출하려 했던 선글래스 아가씨. 모두들 고향 땅을 밟으며 행복에 겨워했다.

신이시여 이게 정말 제가 한 귀성이란 말입니까.

열 다섯시간 이십 이분. 극한 상황에서 사람은 한 차원 성숙해진다 했던가. 기축년 새해 난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다음엔 반드시 ktx를 예매 할 것이다.

 

2009년 1월 적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